오늘은 타칭 흉노인이라는 여포의 전반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여포는 병주 오원군 구원현 출신으로 후한 최북방 사람입니다. 출생지는 오르도스라고 불리는 지역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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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 효무제가 흉노토벌을 계획한 안보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르도스지방의 제패입니다. 후한시대에는 하삭이라고 하면 하북과 동의어로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삭방군이라는 효무제시대의 설치된 군의 이름으로 봐도 황하가 굽이돌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끼어있던 이 오르도스에 대해 중국인이 부르는 지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황하가 굽이도는 이 땅은 말하자면 수도 장안을 향한 칼날이었습니다. (시황시대에는 진의 영토였습니다.)
 흉노가 이 오르도스를 빼앗긴 지 거의 250여년이 지나는 동안 한조도 부침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다시 흉노에게 내주게 되어 거주허용이라는 명분아래 관중지역의 안보를 도모합니다.
 무제 말기부터 시작된 흉노의 분열이 후한시대에는 결정적이 되어 남흉노는 한조에 편입하는 대신 군사적인 요청이 있을 시 응답하는 의무를 집니다. 헌제시대에 이 남흉노가 사예지방은 물론이고 연주부근까지 날뛰는 일이 벌어지는데 장안에서 탈출한 황제의 신변보호요청에 대해 흉노가 의무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배경이 이렇다보니 누군가는 여포를 흉노인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보면 동탁정권 아래의 대다수가 혐의가 있습니다. 또 강남출신 가운데 당시에 산월사람일 인물도 적지 않습니다. 서천에서는 주포, 여개등도 남만인일 수 있죠. 그러니 여포가 흉노인이라는 단서는 없는 셈입니다. 그는 앞으로도 일단은 한족입니다.
 
발굽에 채인 첫번째. 정원   
....스킵
 
발굽에 채인 두번째. 동탁   
 여포가 중앙 정계에 들어갈 수 있던 것은 동탁 덕분이었습니다. 여포의 위풍당당에 동탁이 현혹되었던 게 발단이었습니다. 정원이 여포를 믿고 동탁에게 개겼다는 설정이 지금도 존재하니까 이 사람이 남에게 주는 위압감이라는 건 거품을 거두어내도 당시의 뛰어난 장수들보다도 위였을겁니다. 그리고 실증해보이기도 하죠.
 
 여포와 동탁은 서로 아버지와 자식사이를 자칭했고, 그래서 늘 여포는 동탁의 부중을 수위했습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데다 불같은 성미였던 동탁은 권력을 잡은 뒤에 그 정도가 심해진건지 지 아들에게 수극(표창이라고 생각하면 쉬운 무기)을 던지기까지 했고, 여포는 이전부터 동탁의 시녀 하나와 간통하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던 거지요.
 
 이 날은 여포가 동탁이 던진 수극에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포는 친구가 없었고, 과거에 왕윤이 자신을 동향사람이라며 친근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하고는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소연을 하려고 왕윤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날 왕윤은 동탁주살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포의 이야기를 들은 왕윤은 그를 이 계획에 끌어들입니다. 여포는 "동탁이 나의 아비인데 어찌 그를 죽일 수 있느냐?"고 거부하지만, "동탁과 당신은 성도 다른데 어찌 아비인가, 더구나 자식을 죽이려는 아비도 있던가? 당신은 오늘 죽을 뻔했다."는 말에 혹 넘어가버립니다.(왕윤이 여포를 친근하게 생각한 것은 기실 동탁을 죽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사에서 "동탁은 화가 나면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했는데, 그 아들 격인 여포도 아비의 성품을 물려 배운건지, 어떤 일을 할 때 뒤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윤은 여포를 거둬들일 까닭이 있었지만 일단 군사력을 갖추고 난 뒤에는 꼭 여포를 쓸 이유가 없어집니다. 혹 상장으로 계속해서 쓰려했어도 여론이 그를 비난할 것은 분명했지요. 동탁의 공포정치에 누구보다 일조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여포 입장에서는 왕윤을 선택할 이유는 그가 동탁암살을 자행하지 않는 한 없습니다. 동탁을 죽이면 기댈 곳이 없는데 왕윤은 여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조정대신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오히려 왕윤을 밀고하여 동탁으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더 나았을지 모릅니다. 사실 여포에겐 군사적인 기반이 없었으니까요.
 
발굽에 채인 세번째. 동탁 잔당   
  여포가 먹인 깔빵으로 왕윤은 주살에 성공해 조정을 장악해 여포를 분무장군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어줍니다.(가절은 군법위반시 생사여탈권) 이게 192년 4월 23의 일입니다. 같은 때에 산동에서는 거의 모든 군웅이 기주공방에 관련되어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헌제는 이 시기에 산동으로 사자를 보냅니다.
 그러나 통치력을 회복하려는 황실의 의도와는 다르게 왕윤이 동탁의 잔당은 물론이요 그들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양주민들까지 사면을 허용하지 않자, 가후의 계획에 의해 이각과 곽사의 난이 발발합니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때 장안을 탈출한 민중이 서주까지 이동했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아마 후한서가 지칭한 장안탈출민은 여포와 그 무리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웅기라는 사서에 의하면 6월 초일에 여포가 더 견디지 못하고 장안을 탈출합니다. 소설은 이때 부중에 들러 초선을 데리고 가는 걸로 그리지만 여포는 그렇게 순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포는 왕윤을 돌아보지도 않고 튑니다.
 
 마침 이때 원술은 손견을 잃고 홀로 유표와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여포는 자신이 동탁을 죽여 원가의 복수를 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술을 의지하러 갔는데, 망나니라면 누구못지 않던 원술도 여포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북의 원소를 만나러 갑니다. 이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소가 공손찬에게 역으로 패해 기주로 돌아온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소가 장연을 토벌하기 때문입니다.(장연은 희한한 케이스입니다. 황건봉기의 시발점이 기주인데, 이 기주에서 사람을 모아 노략질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황건군과 장연군은 서로 만나면 쿨하게 헤어지고 각자 털러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합니다. 장연은 황건진압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원소가 정벌하러 오는 이 때까지 위세를 자랑합니다.)
 
발굽에 채인 네번째. 원소    
 원소는 여포의 무용을 쓸만하다 생각하고 장연토벌에 바로 동원합니다. 장연은 2만의 군사가 있었던 상당히 큰 군벌로 기병도 수천에 이르렀습니다. 상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여포는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며 장연군을 박살냅니다. "사람 중에는 여포, 말 중에는 적토"라는 말이 이때 나옵니다. 그러나 이 전공으로 원소군 내에서 여포의 위치가 커지자 여포는 슬슬 자신의 방만함을 보입니다. 따로 자신의 부중을 세우고 군사를 모으는가 하면, 약탈을 일삼습니다. 원소가 보기에는 해치우려면 힘을 들여야하고 아니하자니 암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장양을 치러 보내는 길에 호송하는 인원을 붙이고 이들로 여포를 암살시키려다 실패합니다. 여포는 번쩍 정신이 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양을 찾아가 투항하죠. 장양의 입장에서는 여포를 얻어 원소에 대비할 카드가 생긴 셈이었고, 원소는 여포 때문에 장양을 치지 못합니다. 그의 군졸들이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니까 장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모습이 흡사 야차나 군신과도 같았던 모양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으로 돌려세우는 몹쓸 버릇에 비하면 사람은 누구나 지 살 방편은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무용이 있었으니까요.
 
 비슷한 시기에 연주에서는 장막이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장막은 조조, 원소와 친구였는데 원소가 맹주가 되어 차츰 교만해지자 이를 질책하는 서신을 써붙였기 때문에 원소의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맹주인 원소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살 가망이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조조가 대행해줄거라고 생각한 건 왜일까 싶습니다. 더구나 조조는 장막을 죽이라는 원소의 요청도 무시한 판이었고, 심지어는 서주정벌에 앞서 자신이 잘못되면 일가를 부탁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죠. 애초에 이 사람은 의심은 많은데 담은 작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치고는 194년 당시에 서주학살을 뛰어넘는 대사건을 일으킵니다.
 
발굽에 채인 다섯번째. 조조    
 여포가 장양 아래에 있는 걸 이각이 알자 장양에게 여포를 죽이라고 지시합니다.(어쩜 그렇게 장막과 판박인지...)장양은 여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지만 여포는 다시 도주해 장막을 찾아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포는 장막과 원소가 암살에 실패한 직후에 만나 원소에 대항할 것을 서로 다짐했었습니다.
 
 진궁은 194년 조조가 출정하기 전에 복양으로 보내버린 장수였는데-우리가 아는 것처럼 책사가 아니라.-조조가 출정해 연주가 상대적인 공백에 놓인 상황에서 장막을 부추겨 봉기합니다. 마침 여포가 온 것이 주효했었죠.
 진궁이 조조를 배반한 이유는 복양으로 이동하라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근신조치였거나 청주와 가장 가까운 연주 가장 북쪽에 장막을 도우라고 보낸 것일 겁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진궁이 근신조치때문에 반기를 들었거나 또 거기에 연주의 모든 성읍이 호응했다는 것은 이치상 무리이기 때문에 이유로 꼽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황건적을 흡수한 조조의 방법론에 대한 연주 여론의 반감. 연주는 청주 황건의 침공으로 자사가 죽을만큼 피해를 입었었습니다.
 2.조조의 집권적 성향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호족들의 태도. 한마디로 간섭이 많은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그리고 병량문제로 많이 쪼았겠죠.)
 3.193년 가을에 벌어진 조조의 서주민 약탈 및 학살. 이것은 청주병을 이끈 조조군이 자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1번 이유를 더 부추겼을 겁니다.
 
 진궁의 배반은 3번에 가장 근접할 겁니다. 법치주의자이자 위정자이기도 한 조조가 그 대상이자 목적인 민중을 약탈한 사실 이 자체만으로도 새시대를 열 인물이 아니라고 본거지요.
 결국 장막은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 허사, 왕해등과 모의해 봉기를 일으킵니다.
 
 조조의 서주침공-보다 구체적으로 서주학살은 연주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불러 일으켰는데, 사실 서사전개보다 중요한 메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조의 적이 더 늘어나버립니다. 충분히 자기사람으로 붙잡아 둘 수 있던 장막, 연주 이해집단의 대타로 들어선 여포, 도겸의 뒤를 이어버린 유비. 여기에 아직 살아있는 원술. 조조가 중원을 평정할 시기는 194년으로부터 무려 5년 뒤로 밀려납니다. 
 이는 서주에서의 일이 명백히 실수였다는 최대 증거입니다.
 
 ps. 종사중랑 허사.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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